관계의 시학 2.2

관계의 시학
에두아르 글리상 Eduard Glissant

*이 글은 출판이 아닌 개인 번역작업이자 예술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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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신성한 혈연관계 권력은 네트워크 따위의 그물망에 얽혀 결코 배타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분해된 요소들은 뿔뿔히 흩어진 것들의 어느 한 집합에 의해 전달될 것이다. 이것은 세글랑이 ‘다양성’의 행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더이상 옹호자나, 피해자-영웅의 희생이 요구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그물망을 풀어내고, 함께 고민하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나란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외심에 사로잡히지 않고 신성한 것, 관계의 무질서 속에 가정된 질서를 똑바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영향을 위한 그리스 합창단의 엄숙한 성가 없이 그것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완전히 움켜쥔 신의 손을 예언할 필요없이 그것을 상상할 것이다. 관계의 투명성을 상상하는 것은 또한 그것을 부추기는 것의 불투명성을 정당화하는 것이다. 신성한 것은 우리에, 이 네트워크에, 우리의 방황에, 우리의 방랑에 있다. 

여기 (여기서) 혈연관계에 대한 관념, 그 에너지, 그 선형적 힘은, 더이상 우리에게 기능하지 못한다; 뿌리의 정체성이나 정복적인 정당성도 필수적이지 않다; 결과적으로, 어떤 존재론적 기반의 일반화도 요구되지 않는다. 

서구가 처음으로 세계에 투영된 순간, 이것이 실현되기 시작했다. 이 발견과 우월성의 투영은 절대적인 가치로 여겨졌다. 심지어 지형적인 발견들과 과학의 정복 모두, 동일한 대담성과 동일한 일반화 능력으로 추진되었다고 주장되었다. 영토적인 정복과 과학적 발견은 (이 용어들은 교차가능하다) 균등한 가치를 지녔다고 간주되어 있다. 고대 친자관계의 절대성과 선형성의 정복, 지식으로의 투영과 화살같은 유목민, 그 각각은 자신의 성장에 서로를 사용했다. 하지만 나는 정복의 첫 충격으로부터 이 움직임이, 그 시작을 알린 이중성을 초월하게 될 배아(그것의 실현이 아무리 늦어질 지라도)를 잉태했다는 입장을 고수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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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 이중성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려 한다. 우리는 과학적인 폭로에 관한 다니엘 부르스틴의 저서 ‘발견자들’  The Discoverers (로버트 라퐁 Robert Laffone의 불어 번역[1989]에서 부제는 “헤로도토스에서 코페르니쿠스로-콜롬버스에서 아인슈타인으로의-세계를 발명한 사람들의 모험들”이었다.) 의 요점이 된 발견과 정복에 혼동된 채로 시작해서는 안된다. 그 말은, 물론, 이 ‘항해’의 정복자들과 ‘지식’의 지배자들은 하나이고 똑같다는 뜻이다. 26장 “욕망없는 제국”의 마지막에 부르스틴은 “발견자가 되기 위해 기술과 지식, 그리고 국가의 자원을 충분히 갖춘 채, 중국인들은 스스로 발견당할 운명에 처했다. ”

이러한 종류의 판단은, 관계에서, “발견”한 자가 이 행동의 이점을 절대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관계는 어떤 선례도 “붙잡지” 않는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름 없는 지형은 문화간의 접촉에서 탄생한 무한한 변형의 영역이다. 폭로는 다른 종류로의 확장에서 지칠줄 모르고 적용된다.  “발견”, 예측, 화살같은-유목주의 또는 지식의 투영은 그곳에서 상시되거나 네트워크를 통해 이득을 얻는다. 지배력은 그곳에서 번영하나 정당성은 죽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Absalom! Absalom! 은 오이디푸스의 신화(또는 이후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얻은 교훈에 따라 일어날 수 있을 근친상간, 친자관계의 도착을 우려한다. 그러나 이 결정적-치명적-요소는 또다른 “인과관계의 일련”의 일부일 것이다. 즉, 흑인의 피가 침투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농장주 서펜의, 아이틴 여인의 첫 번째 아내를 식별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흑인의 혈통이 발견되자 (대게 미국의 남부 귀족 가문들이 얼마나 극도로 두려워하고 종종 부주위한 증조부모에 의해 저질러지는 이런 “부정한 행동” 종류에 시달리는지를 회상하며), 설립자 서펜은 모자와의 연을 끊고  미시시피에 그의 혈통을 다시 세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설립도 친자관계도 다시 시작되어질 수 없었고, 서펜의 역사는 그를 따라잡는다. 그가 빈공간으로 내쫓아버린 이 첫째 아들과 그의 두 번재 결혼에서의 딸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재앙 그 자체이다; 하지만 그의 첫째 아들이, 그의 외모에도 불하고, 흑인이라는 발견은 (서펜이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발견은 마침내 친자관계가 확장의 광활한 공간으로 영원히 사라질 수 있는 조건들을 하나로 모았다. 이것은 이 소설에서 폭로의 이중적인 목적을 말한다. 근친상간은 친자관계의 방향을 틀어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은 (미국의 남부에서) 근친상간이 인정될 수 있다고,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흑인의 피가 침입하는 것은 아니라고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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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공간: 아프리카에만 있기에, (원천과 신기루는 우리에게 단순화된 표현으로 유지된다.) 자신만의 역할을 보여준다. 모든 포크너의 작품에서 가득 쌓여진 어원이 같은 말들은, 강제적이든 아니든 간에 피가 섞여 있는, 이중 혈통인 (흑인과 백인), 가차없이 재현하고 카리브해 사회 구조 형성에 오랫동안 기여해온 가족 생활양식을 거의 회화화 한다. 서펜이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게 아이티에서 그의 운명을 맞닥뜨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들의 순수함에 의해-순진함으로 서사된-서술자로 선택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비극적인 무감각상태(이 단어 ‘stupor’ 는 내게 서펜 ‘Sutpen’과 아주 유사한데 나는 오랫동안 ‘Stutpen’이라 발음했다)에 시달린다. 그러나 비극적인 위기는, 장엄하고 의례적으로 초례된 서펜 가가 불타오르는 과정에서, 정당성을 회복시키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이 순간은 피할 수 없는 그것의 소멸을 신성화 한다. 포크너의 비극은 아에스킬루스의 비극과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공동체의 균형을 다시 세우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 그것은 친자관계의 신성함을 파괴하는 이단을 범한다; 그것은 솔로몬의 아들들의 역사를 영원히 닫게하고, 확연히 졸부스러운 스노페스의 Snopes 아들들에게 열린 전망을 펼쳐 보인다. 흡사 다른 위대한 비극적인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포크너의 작품은 정치학과 서정성을 아우르거나 추구하지 않고, 우리를 그들의 현대적 양극인, 폭력과 불투명성에 맞서게 한다. 

(광활한 공간[확장되는 것]은 그것의 그물망으로 갈라져나간다. 또 다른 시학에선, 비약과 분산을 말한다. 횡단성. 수량화될 수 있는 무한대. 실현되지 못한 수량, 지칠줄 모르고 뒤엉켜진 것. 광활한 공간[확장되는 것]은 단지 공간일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꿈꿔온 시간이다.)

 (또 다른 결론적인 괄호를 열어본다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확장이 마친 공간에서 기능하지 않는다.

여기선 어머니 노릇도 아버지 노릇도 요인이 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친자관계의 법칙에 따라 따라 의존하는 반면, 확장된 가족은 순환적이고, 마치 포크너 작품의 그물망 같이 걸려든다. (그리고 이 괄호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열어볼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해석들은 전형적인 자기 민족 중심 사상 그리고 종종 서구 사상의 순진한 투영들의 친자관계의 테마들-남근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의거된, 모계 콤플렉스, 등, 그리고 그것이 필요보다 더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더 나아가, 로저 드라곤네티의 Roger Dragonetti ‘중세 시대의 편지생활’ (파리: Editions Du Seuil,1980)에서 라틴의 부성적인 권위와 규범과는 반대로 중세 시대에 나타난 언어의 여성성에 (모계의) 관한 흥미로운 관찰을 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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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여성성 (‘아버지’에 대한 신학의 역상) 에 따른 특권은 로맨스 언어의 탄생과 함께 발생한다. 그로부터 라틴어의 특혜 안에서 언어에 대한 시의 신비로움이 모국어의 신비로움과 결합하게 된다. 본질과 멀리 떨어진 자들의 욕망의 언어는, 결말이 나지 않고 결말을 낼 수 없는 모든 원정이 자매, 부인, 여왕 또는 성모, 궁정연애에 의해 차례로 상징되어진다. (45-46)

가치 있는 관찰이지만, 예로 들어 크리올 언어의 출현에서의 카리브해 문화의 맥락에서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크리올화 기간 동안 프랑스어는, 중세 시대의 라틴어처럼 (8세기에서 11세기까지 단순한 로맨스어가 Lingua romana rustica 존재했더라도), 유일한 문해 언어는 아니었다. 그 대신, 그것은 다른 곳에서- 그곳(여기)에서, 혈연관계에 의한 모든 짐들이 버림받은 곳에서, 그것의 역사를 발휘하고 있는 살아있는 관용어였다. 남성 중심의 사회 안에서 혈연관계를 용인한 정당성은, 주로 정신적 질서의 대항력 중심으로서 여성성을 암시한다. 이것이 드라곤네티가 로맨스 언어들의 탄생에서 발견한 것이다. 여성 중심의 사회 안에서 정당성은 “자연스러운” (예를 들어, 어머니의 역할을 의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것이었고 가치의 여신상으로 세워질 수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론 아프리카 문화들은, 조상의 “사슬”에도 불구하고, 혈연관계의 숨겨진 폭력성에 복종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의 다양한 인종들이 속한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크리올 언어들, 그 모국어들은 너무도 다양해서 그 안에서 그들을 “연합”시키기도 하며, 본질로만 귀중하게 여겨지거나 어머니나 아버지의 것에 그 가치를 선정하려 한다. 그들의 위협적인 폭력성은 통합된 것이지만 ,인정하건대, 광활한 공간으로 펼쳐나간다. 이 폭력성은, 현대 언어들의 존재성에 갑작스레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새로운 사실로, 그 언어들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그들의 광범위하고 불안한 의식에 위기를 초래해왔다. 언어는 더 이상 부드럽게 사라지지 않고, 더 이상 순수하게 발전하지 않는다. 어떤 상징적인 시스템도 이 모든 것에 저항할 수 없다). 마치 초기 발견자/발견된 사람이 관계에서 평등한 것처럼, 한 공동체가 가진 정통성과 그와 반대되는 것도 처음에는 서로에게 매료된다. 즉, 정통성은 우연성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어진다. (누군가 나에게 입양은 진정한 생식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했다.) 나는 현재까지 발견자들의 상속자들이 지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뿌리를 내리기 위해 침묵의 힘을 겉으로 표출해내지 않은, 대신에 친숙하거나 문화적 모델들을, 그리고 그것의 삶의 방식이나 그 설정을 강요하는, “어딘가에서” 혈연관계를 회복시키려는 그들의 의도를 충분히 지각하고 있다. 그렇기에 뿌리내리는 것은 다른 성질의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관계 안에 있다. 혈연관계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없고, 그것의 신화는 무한정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이디푸스는 확장된 광활한 공간으로 교류되어질 수 없다. 

그렇다면, ‘관계’에서 폭력과 불투명성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러한 질문들을 더 잘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계를 겨냥하는 서구적 사고의 근원으로, 서로 얽히고설킨 여행을 시작했다. 

오늘날 고대의 편협한 친자관계의 폭력은, 충돌된 문화의 무질서한 폭력에 뒤흔들리고 있는데, 어떤 예측도 그 경계를 강요하지 않고 반복되어지는 정당성에서 (그 결과 법과 이유의 질서를 계승하고, 파생된 질서는 소유와 정복에 연결됨으로) 풀려나버린다. 


* 배경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모계 사회의 중심에서 여성의 억압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안틸리스 사회를 모계사회로 묘사하는 것을 주저할 것이다.) 대체로 이곳의 남녀의 관계에서 그들의 태도는 식민지의 압력에 의해 결정되었다. 집단 의존은 “생식력의” 남성 노예의 마키즘을 강화시켰지만 정신적 대항력으로서의 여성상에 대해서는, 여성들이 저항의 중심지에 빈번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인했다. 바로 이것이 아마도,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왜 마티니크 여성들과 식민지 국가에서 그들의 사회화에서 페미니즘을 무시하고 다양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권력 정복에 곧장 전가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페미니즘은 서구의 여성들이 그들의 투쟁을 통해 고대의 유사-권력, 그들의 정신적 대항력을 진정한 평등으로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치로 여겨졌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전히 다수의 똑같이 강렬한 폭력적인 사건, 강간, 그리고 근친상간, 여성들이 희생자가 되어버리는 사건들이 도처에서 똑같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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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정복으로부터 기인된 통치는 지속되며 더욱 매력적으로 거대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대한 순환들 속에서 그 경계는 결국 사라지고 만다: 이념적 분석에 의한 빛은 더이상 이 나라에 자유를 밝히지 않는다. 또렷히 눈에 보이고 감지할 수 없음과 동시에 만져낼 수도 없는, 이 동시대적인 지배의 형태에 대한 저항은 차례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며, 다른 저항의 중심으로부터 (현재로서는) 어떤 지원 가능성도 없다. 비록 억압된 국제 관계에서는 비밀리에 조직할 수 있더라도, 고통받는 국제 관계는 이 순환성 안에서 공개적으로 구조화할 수 없다.  

만약 배타적인 친자관계의 폭력성이 애초부터 뿌리의 신성한 진리 속에 묻혀있었고, 그리고 그 불투명한 진리 내부로 들어가도록 비극적으로 허용됐다면, 또한 만약 이 불투명성이 진리를 의미하게 되고 동시에 그 폭력성을 가리게 된다면, 이는 언제나 비극적인 갈등에서, 마침내 그 기원을 알려주는 투명성의 기능에서 발생한다. 서양사에서도 이와같은 투명성은, 인류의 공통된 진리가 존재하며 유지된다고 예측한다. 그것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되는 것은, 진리의 근본이 발각됨과 동시에 세계를 일깨우려는, 투영시키려는 행위이다.  

이러한 환원적인 투명성에, 불투명성의 힘이 맞서 작용한다. 더 이상 친자관계의 진리를 감싸고 재활성화시킨 불투명성이 아니라, 관계의 광활한 공간에서 모든 위협과 매혹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되어지는 것, 즉, 혼합되어지는 것 없이) 접합되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불투명성이라 부르는 다양성을 보호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관계’의 상상을, 예전부터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로부터? 아니면 마야인들? 팀북투에서? 이슬람교-이전 시대 그리고 인도의 이야기꾼 이전부터?) 예측할 수 없는 소용돌이의 불길한 예감을 가진, 투명성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서구에 의해 진행되는 “일반화”는 수세기 동안, 다른 공동체들이 꽃피울 시기에 계층적인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시도로 그들의 속도를 동등하게 일궈냈다. 이제 파노라마가 결정되고 등거리들이 묘사되었으니, 이제는 덜 필요한 “비일반화”로 돌아갈 때가 아닌가? 터무니없는 과잉된 특수성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닌, 그들이 직면한 이 혼란 속에서 벗어나,  그들 사이의 연결에 완전한 어느 (꿈-꿔왔던) 자유로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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